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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우수상 _「다섯 손가락으로 잡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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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술누리 작성일 25-04-09 16:07 조회 16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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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수 상-산문학 정은경


다섯 손가락으로 잡은 희망




나는 다섯 손가락으로 자판을 친다. 한쪽 손이 없기 때문이다. 남은 한 손으로만 블로그를

쓰기 시작한 나는 감사하게도 우리나라 상위 1% 안에 들어가는 블로거다. 2020년 2월 18일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2022년 2월 지금 현재 그렇다. 내 블로그가 이렇게 주목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 남편 덕분이라 생각한다.


2012년 12월 크리스마스 캐럴이 한참 울려 퍼지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5시 나는 잠자다

말고 이불이 척척해서 잠을 깼다. 옆에서 함께 자던 남편이 소변을 지린 것이다.


“여보! 일어나 봐요! 이게 무슨 일이야?”


하지만 남편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서 어제 저녁 먹은 것을 분수

뿜듯이 토해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큰일 났구나 싶어 119를 불렀다. 지역 병원을

거쳐 사설 구급차로 갈아타고 서울 S 병원으로 달렸다. S 병원에 자리가 없어 H 병원으로

옮긴 뒤에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중환자실로 남편을 옮기고 나니 정오가 되었다. 의사가

나를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의사는 너무도 담담하게 말했다.


“뇌출혈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마음 단단히 잡수세요.”


드라마에서 볼 때는 남의 일같던 그 말을 내가 직접 들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와 멍하니 한참 정신 줄을 놓고 있다가 내 몰골을 문득 보았다. 슬리퍼에 맨발로

운동복에 파카 하나 달랑 걸친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중3 아들이 소리 없이

다가와 살포시 끌어안고 운다, 아들이 우는 순간 내가 정신 차려야 우리 아이도 키우고 우리

남편도 돌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그때 눈물이 그렇게 뜨거울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알았다, 아들이 우는데 그 눈물에

내 살갗이 데이는 듯 온몸을 파고들었다.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 뜨거웠던 눈물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내 손을 놓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연락받고 달려온 친정엄마와 함께 돌려보내고 초췌한

몰골로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엉엉 소리 내어 저녁 내내 울었다.


나는 왼팔이 없어 다섯 손가락을 가진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신’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이유 없이 친구들에게 맞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막말, 반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주변 모든 이의 말들이 나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그래서 독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비장애인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노력했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그런 나의 아픔에 더하여 남편까지 이런 고통을 당하니 ‘열심히 산 대가가 이거밖에 안

되나?’ 싶어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한참을 울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역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 진동했다. 남편이 아침에

토하고 오줌 싼 것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그것을

다 치웠다, 이때부터 환자가 된 남편의 간병과 고된 생활고가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세상이 너무 무서웠다. 갑자기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남편이 아프다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가끔 사람들이

물어보면 남편이 서울로 일하러 갔다고 둘러댔다. 아침 8시면 태연하게 내가 운영하는

의료기 매장에 정확하게 출근을 했다. 주말 부부라고 사람들에게 말해두었다. 토요일이면

남편을 간병하기 위해 충북 음성에서 경기도 구리의 병원까지 올라갔다. 또 나중에 보탬이

될까 싶어 매주 한 번씩 이혈(귀의 혈자리에 보인석을 붙여주는 것), 주열(열을 주입하여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서 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 등의 자격증 공부를 하러 다녔다.

그렇게 2년을 정신없이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입원중인 대전 요양병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OOO씨 보호자시죠? 지금 환자분이 위독하시니까 빨리 오세요.”


당시 병원비, 간병비, 아들 학원비, 부모님 생활비, 월세 등을 혼자 벌어서 감당해야

했던 나는 남편을 내가 사는 음성과 가까운 대전 병원으로 옮겨둔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대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남편의 부음을 들어야 했다.


나는 늘 남편이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옆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줄 알았다. 내가 부르면

항상 당연히 대답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다.

장례식을 마치고 사흘 뒤 비몽사몽 상태에서 막바로 매장으로 갔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고

오다가 저녁 8시 정도 지나서야 손님들 발길이 뜸해진다.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갔으나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그냥 눈물만 났다. 너무 힘들게 살아온 나 자신이 불쌍했다. 1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장애인으로 힘들게 살다가 간 우리 남편도 불쌍했다. 사춘기에 아빠를

잃은 우리 아들도 너무 불쌍했다.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3년을 거의 매일 울었고,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2017년 여름 어느 날 남편이 꿈에 나타났다.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 갑자기 큰

소리로 꾸짖는다.


“너, 정신 안 차릴 거야!”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남편은 평소 화를 잘 내거나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그런 남편이 화를 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문득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졸업장만 있으면 어디 가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원만 졸업하면 남편과의 추억이 전혀 없는 곳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결국 2018년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정말 생각대로 2020년 1월 23일 졸업도

하기 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경기도 마석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는 했지만 부모님, 아들과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야 너는 어려서부터 문고리 잡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참 좋아했어.”


또 학교 다닐 때 아이들을 앉혀 놓고 칠판에 무언가를 쓰면서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랬다. 내 어렸을 때 꿈 중에 하나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강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그때 유명한 강사가 멘토링을 해주었다.


“강의를 하고 싶으면 먼저 작가가 되세요. 1일 1 블로그를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내고

강의를 해보면 어떻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둠 속에서 빛을 본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2020년 2월 18일부터

나는 1일 1 블로그를 시작했다.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 결코 쉽지 않았다. 정말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엄청 고생했다. 아침 7시도 안 되어 출근해서 저녁 8~ 9시까지, 어떤 날은 그

다음날 새벽까지 끙끙거리면서 글을 써야만 블로그에 1편을 간신히 올릴 수 있었다.


또 TV에서 본 작가처럼 글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자판을 한 손으로

두드리다보면 손가락에 쥐가 날 때도 많았다. 그래도 꼭 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1일 1

블로그라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고, 2년이 넘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다.


1일 1 블로그를 한 지 5개월쯤 되었을 때, 교육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정 강사님, 나에게 블로그란? 주제로 강의를 할 수 있을까요?”


첫 강의 의뢰였다. 꿈인지 생신지 얼떨떨했다. 그렇게 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 뒤 강의를 하다 보니 나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홍보가 중요했다. 나를 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유튜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콘텐츠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콘텐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동영상을 어떻게 찍는지

업로드는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몰랐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콘텐츠도 찾고, 동영상은 어떻게 찍는지, 업로드는 어떻게 하는지를 배워야 했다.


일단 콘텐츠를 찾기 위해 내 명함집을 뒤적거렸다. 20년을 거래한 의료기 업체 사장님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핑계 대고 만날까 고민하다가 일단 카톡을 보냈다.


“사장님 제가 협업할 것이 있는데 좀 만나주실 수 있을까요?”


조금 후 그러면 시흥으로 오라는 사장님의 카톡을 받았다. 협업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시흥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때라 밥을 먹자고

하면서 설렁탕집으로 들어간다. 60 가까운 사장님은 연륜이 있었다. 내 얼굴 표정이

어두워 보였는지, 천천히 먹으라고 하면서 아버님이 한약방 하시던 이야기, 대만으로

한의학 유학을 갔던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그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는지에 대한 유튜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내 주변에


암을 앓았던 환자분이 계셨다. 그 분이 내가 대체의학을 전공했으니 자기를 인터뷰한

것을 유튜브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그리고 다른 암 환자도 내게 소계시켜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콘텐츠를 찾았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동영상은 어떻게 찍는지, 편집은 어떻게

하는지 또 채널아트와 썸네일은 어떻게 만드는지 등등을 배웠다. 유튜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지 딱 한 달 만에 나는 유튜브 동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블로그와 유튜브로 나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기계치다. 그런 내가 혼자 유튜브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고 그 덕분에 또 강의가

이어졌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 기계를 잘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기계치인 나에게는 엄청난 성과였고, 하늘을 날 듯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내 몸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길을 걸을 때 허공을 걸어가는 것

같았고, 손톱은 종이처럼 얇아서 무언가에 살짝만 부딪혀도 찢기고 피가 나서 테이프로 칭칭

감아야만 했다. 또 치질이 심해서 정말 어느 순간에는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우울했다.


내 건강 상태를 보기 위해 건강 검진을 받았다. 일주일 뒤에 검진 결과를 들으려 다시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마주 앉았는데, 의사 표정이 밝지 않다. 위암일지 몰라 소견서를 써

줄 테니 빨리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편안했다. 그 표정이 너무 기가 막혔는지

오히려 의사가 화를 냈다.


“의사 말이 말같지 않습니까? 지금 그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있을 때가 아니라 빨리 큰

병원에 가보세요.”


알았다고 얘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냥 좀 걷고 싶었다.


암세포는 매일 우리 몸에 5,000개씩 생긴다. 이때 우리 면역력이 강하면 면역세포인

NK세포나 대식세포가 암세포를 제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면역력이 떨어지면 NK세포나 대식세포와 같은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제거하지 못하면서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다. 암에 걸리는 가장 큰 원인은 뭘까?

바로 스트레스가 아닐까?

암은 누가 만든 것인가? 다름 아닌 내가 만든 것이다. 그러면 암을 물리칠 수 있는 것도

나다. 주사나 약이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 나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이 병원에서 2년을 앓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평상시처럼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항상 빌었던 것이 기억났다. 일단 나

자신부터 행복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첫 강의를 한 뒤로 강의 요청이 계속 들어왔다. 15분, 30분짜리 강의를 하다가 드디어

1시간짜리 강의가 들어왔다. 나는 “정은경의 희망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반응이 좋았다. 내 강의를 듣는 내내 우는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데 내 블로그를 읽으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감사하다는 댓글들을 달았다.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다니는

통합유치원에서 강의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전화도 왔다. 그렇게 강의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행운이 찾아왔다. 지금 천안 인생극장과 라이브 방송을 운영하는

대표님이 내 강의를 듣게 되었다. 대표님은 나에게 우리 천안 인생극장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강의실에서 강의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천안

인생극장 관리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동기부여 강사로, 또 장애 인식개선 강사로, 그리고

메타버스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꿈, 책 출간도 준비중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위기를 많이 만난다. 위기가 왔을 때 그것으로부터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그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도전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물론

도전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블로그를 열었고 나를 알리기 위해 유튜브를 했다. 블로그와

유튜브 덕분에 강사가 될 수 있었고 또 취직을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이 세상에 공짜로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꾸준히 꿈을 꾸면서 노력하다 보면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에게 나는 상위 1%인 블로거로서 글을 남긴다.


“00아빠 잘 지내지, 아들과 나도 당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앞으로는 절대 울지

않고 씩씩하게 잘 살게, 항상 고맙고, 감사해, 그리고 당신에게 약속한대로 우리 아들 잘

키워놓고 갈게, 그때 만나자.”


[이 게시물은 예술누리님에 의해 2025-04-15 09:37:23 공지사항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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