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입선 _「만들어지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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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선-산문학 민경례
만들어지는 꿈
사람들은 내 이름을 울예라고 불렀다. 내가 다섯 살 때 1·4후퇴 피난 시절이었는데 워낙
많이 울어서 울예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는 1959년 시골 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진학을 했다. 시골집에는 남동생과 언니 엄마 이렇게 세 식구가 남았는데 그 후
초등학교 3학년 남동생까지 서울로 전학을 했다.
그때 영등포에 오빠가 살고 계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들 교육 때문에 데려간
것이다. 울예는 동생과 주말에 엄마한테 왔다 월요일 새벽 첫차로 올라가곤 했다 서울 사는
오빠도 올해 첫째가 일학년에 입학했다. 운수업에 종사하는 오빠는 올케와 시골 부모님들
뜻으로 맺어진 부부다.
품앗이 일꾼들과 동네 말꾼들이 방안 가득 모였다. 아버지가 안 계셔 저녁이면 석유
등잔불 밑에 고전 읽어주는 사촌 오빠가 날마다 오셨다. 결혼하지 않았는데 서당에 다녀
한문책을 잘 읽었다. 말꾼들은 몸이 고단해도 졸음을 참으며 매일 모였다. 오늘은 또 어떤
책을 읽을까? 사람들은 콩쥐팥쥐 임꺽정 장화와 홍련 삼국지, 돌아가며 읽는 이야기에
빠졌고 학생 울예와 동생은 말꾼들에게 밀려 윗목에서 배 깔고 공부를 했다.
시골은 농번기 때라 날마다 바쁘다 오늘도 말꾼들이 잔뜩이다. 동네 어귀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밤중에 울예가 나타났다. 아침에 서울 올라간 딸을 보고 놀란 엄마가
웬일이냐고 물었다. 걸어서 왔다는 말만 남기고 쓰러져 버린 울예. 다음날 사건이 큰아버지
집에 알려지고 올케는 큰 집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엄마가 사준 귀한 운동화 속에서
여린 발톱들이 까맣게 멍들었다. 발바닥이 아파 딛지도 못하는 울예는 서울 학교를
포기한다며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남동생 혼자 서울에 남아 학교에 다니는데 남동생은
말이 없다 울예는 예민한 사춘기라 눈치 빠르고 자존심도 무척 강했다.
시골에서 놀고먹는 울예다. 허수아비 머리에 포장치고 깡통 두드려 참새 쫓으며 엄마
돕는다고 논에 나왔다. 늦가을 땡볕이 강한 벌판에 메뚜기 잡고 방아깨비 잡고 개구리 잡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친구들을 보며 포장 밑에 숨었다.
“올케언니! 내일 미술 시험 있어요, 준비 좀 해주세요”
“아유! 이번 시험에 떨어져야지 붙으면 큰일이요?”
너무 슬펐다. 울면서 학교 추천해준 노량진 고모네로 갔고 언니가 준비해 줘서 시험을
치른 울예는 막내 고모 집에서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에 다니던 가을이다. 엄마보고 월요일 새벽 첫차로 서울 집에 왔다. 방문을
열어도 올케가 쳐다보지도 않았다. 새벽에 엄마 곁 떨어져 온 따뜻한 기온이 아직 식기
전이라서인지 갑자기 그리움이 격해 울컥했다. 동생에게 ‘나’ 시골 간다, 말한 후 동생만
학교 데려다주고 돌아서 엄마에게 갈 생각을 했다. 주머니를 살펴보니 학생 전차권만 있다.
현금이 없어 버스를 탈 수가 없다, 갑자기 엄마가 더 생각났다. 무작정 걷겠다고 마음먹고
울예는 아침 여덟 시부터 버스길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강화로 내려갔던 버스가, 서울로 왔다 갔다 하는 걸 봤다. 왠지 창피했다. 그래서 버스가
오면 둑으로 내려가 걸었다. 고촌까지 왔을 때다. 천둥고개는 길고 긴 산이다, 거기는
나무들이 우거져 무섭기도 하고 이야기책에 마적단이 나왔다던 소리가 생각나 첫발을
들어서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땀이 났다. 울고 싶었다. 하늘을 봤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마치 옹달샘 같고 눈부시게 떠 있는 태양은
따뜻한, 햇살로 울예를 비춰주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 나를 돕는구나! 마음에
위안을 받으며 걸었다. 배고픈 것도 잊고 엄마한테 간다는 목적만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드디어 김포읍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집에 빨리 가려면 버스를 타야지 하는
생각에 어느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양곡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속으로 차 좀 태워주세요, 하고 싶었다. 울예 마음을 알 수 없는 아저씨,
“어! 아직 십 리쯤 가야 하는데,”
울예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은 점점 어둠이 짙어지고 산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정겨웠다. 낯선 사람은 물기도 하는 개인데, 남의 집 개 짖는 소리가
반갑다는 건, 가까이 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머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산소만
보며 걷다 그 저녁 개 짖는 소리는 정말 반가웠다.
시골 학교에서는 울예가 서울로 유학 간다고 따로 과외공부도 시키고 시험 보러 갈 때
교실 창문에 손 흔들어 친구들이 환송해 주었는데, 이제 학교를 안 다닌다면 어쩔까?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졸업장 받으러 학교 가지도 않고 시골에서
심한 사춘기를 일 년 보냈다.
엄마는 아들이 인천에 같이 모여 살자고 하니 농지를 팔아야 할 것 같다고 큰집에 말했다.
아니,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큰아버지가 말리셨다. 결혼하지 않은 언니도 여기가 좋은데
엄마! 이사 가고 싶으세요? 울예는 정말 가지 않겠다며, 올케 만나는 것 싫다고 했다.
아들이 무엇인지 시골 땅을 팔아 버스회사를 차린다는 아들 뜻을 엄마는 거절 못 했다.
옛날 어른들은 자식 중에 장남을 최고로 꼽았다. 여기저기 논밭전지 일부를 팔고 인천으로
아들과 살림을 합쳤다. 방 다섯 개 일본 집에 엄마 식구, 4명. 오빠 식구, 6명 열 명이 모였다.
우리 가족 수만 해도 많은데 저녁이면 버스 기사, 조수, 안내양까지 차가 인천에서 끝이
난다는, 도마리 되면 집으로 들어와 자고 아침 배차 순대로 나갔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
자정이면 차도 못 다니던 시절이다.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시골에서 놀기만 하다 나전칠기 기술을 배워 장래 사장님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환길이도 식구가 됐다. 이모의 아들이자 시골 친구다. 환길이는 밤이면
기름 냄새나는 조수들과 방을 같이 쓰며 자는데 방바닥이 정말 춥다고 했다 따뜻하게 자며
몸을 쉬어야 하는데 구들이 냉골이라 아궁이 조사를 했다. 공기통이 꼭 막혀있다. 연탄불
많이 탄다고 알뜰한 올케가 막았던 모양이다. 불 마개를 확 빼 던지고 잠을 자고 새벽이면
따뜻해질 때 출근을 위해 일어났다고 했다.
“환길아! 일어나 보렴, 울예 좀 찾아보자,”
“울예 어디 갔어요?”
“오빠한테 꾸중 듣고 나가 버렸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을 여기저기 식구들이 찾아보지만 어디도 없다.
“울예야! 언니가 불렀다.”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통행금지 사이렌이 무서워 집 근처에 온 울예를 언니가 봤다.
“저녁이면 형님이 들어와 왜 야단 하신데요?”
“울예가 온종일 라디오 듣는다고 형수가 일러 낮 열두 시에만, 들으라고 야단하는 거란다.”
“이모님! 야단보다 울예를 학교 보내야 하지 않아요?”
서울에서 여중 다니는 사촌 언니 딸 경자가 울예와 또래 친구라 주말이면 놀러 왔다.
경자도 엄마가 새엄마라 작은할머니 집에 오는 것이다. 대학생 사촌오빠도 주말이면
유성기 틀러 왔다. 배워야 한다고 울예를 학교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울예는 서대문에 있는
동명여중을 다시 들어갔다. 거기에는 고모네 언니가 다니고 있었다.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고 완전 일 하는 사람 언니는 극장 한번 가는 것, 자체를 모른다.
엄마의 잘못 판단이 삼 남매를 힘들게 했다. 시골로 갈 수는 없었을까 엄마는 혼자 친척
집으로 나들이를 잘 가셨다. 말없이 착하기만 하던 언니를 결혼하라고 중매가 들어왔다. 참
잘 된 것 같다. 인천에 살면서 인천으로 시집을 갔다.
남은 동생은 둘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형수와 함께 살아온 남동생은 무사히 학교에
잘 다니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 같은 형 밑에 공부하며 대학교 때까지 야단맞았다. 훗날
사회인이 되었을 때 성격이 대범하지 못하고 소심했다. 엄마와 언니 동생을, 오빠 밑에서
지켜내던 보호자 울예는 반항심도 대단히 강했다.
대낮에 고부간의 싸움이 났다. 엄마가 며느리한테 한 소리 들으셨다. 나이 육십인데 오래
산다고. 올케가 시어머니를 향해 사람 너무 오래 살면 안 된다고 했다. 화가 나도 할 소리가
있고 못 할 말이 있는데 화가 난 올케가, 독설을 퍼부었다.
“사람이 맘대로 사나요.”
“안 죽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올케의 시집 식구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엄마가 시골 큰집으로 자식들을 두고 내려가
버렸다. 장남만 믿고 살던 엄마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식에게 땅 팔아 주고 :삼 남매
모질게 고생시키다, 시골 큰집으로 당신 혼자 가셨다.
이사 가는 날이다. 1970년 운수사업이 잘되어 서울로 집 짓고 이사 간다고 부산했다.
환길은 인천에 남기로 했다. 주식회사 00회장님 백열 평 이층집은 연못도 있고 잉어도 있다.
분수대도 있다. 그러나 울예는 이사 가는 날 따라가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는 시절이라
연락이 두절이다. 사흘 후 서울에 오신 엄마에게 울예가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서울역에 있으니 돈 좀 갖고 나오세요.”
“너, 거기가 어디야?”
“서울역 버스 정거장이요.”
엄마는 막내딸 전화를 끊고 세컨드 며느리에게, 연락해 달라고 ‘한’ 기사를 불렀다.
서울역으로 돈 갖고 나오라는 엄마를 기다리던 울예 앞에 어느 여인이 나타났다.
“고모!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해요.”
우체국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 차 안에 엄마가 계셨다, 돈 달라고 손 내미는 울예를
차 안으로 밀어 태우고 차는 떠났다. 거대한 이층집 앞에 차가 도착한 곳은, 오빠의 세컨드
그녀의 집이라고 했다.
“우리 집에 아무도 없으니 나하고 살아요. 낮에 내가 나가면 집에 학자 혼자 있고 불편한
것, 말하면 학자가 도와줄 것에요”
그렇게 울예는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내양 하다 나이 들어 그만둔 뚱뚱한 학자라는
여성이 살림을 돕고 있었다.
울예가 마음을 추스르고 잠시 살고 있을 때 이 집에 싸움이 났다. 올케가 세컨드 집에
찾아온 것이다. 아래층 안방 문 앞에 올케가 있고 오빠와 세컨드는 이 층 쇼파에 앉아 있다.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가 그토록 미웠을까? 시집도 가지 않은 시누이가 세컨드 집에 와서
살 때 올케 마음도 뉘우침이 있어야 하는데, 말 한마디가 없다.
야속한 올케 앞에 울예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 울예가 다섯 살이고 동생이 두 살 때
오빠한테 시집와 우리가 자라는 것을 다 본 부모 같은 올케다. 아래층 ‘전’ 기사 집에 내려가
조카딸에게 전화를 걸어 올케를 모셔가게 했다
“나, 막내 고몬데 너희 엄마 여기 와 있다. 엄마 혼자 이 집에서 불쌍한 모습으로 나가게
하지 말고, 할머니 모시고 와, 그리고 너희 엄마 모셔가라.”
남편과 세컨드로부터 홀대받고 비참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그냥 볼 수 없었던 울예다.
집안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데리러 오고 자식이 울타리 되면, 세컨드 앞에 남편은
뺏겼어도 가족이 있다는 올케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었다. 울예가 그 집에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울예는 친구 희자네 집이 너무 좋았다. 가난해서 하루 한 끼 수제비를 먹어도 너무 맛있고
한방에 형제들이 같이 구르고 자는데 그 모습이 따뜻하고 좋았다. 흑석동 꼭대기 방 두
칸이 전부인 친구 집. 내가 속상하면 찾아갔던 친구 집, 먹고 자고 해도 친구 엄마는 귀찮은
것이 아니라 수제비 해줘서 미안하다고 오히려 딸 친구를 위로해 줬다. 희자네 집에 있다
미안하면 친구를 데리고 구산동 집에 왔다. 대문을 들어서는 희자, 울예야! 무언으로
묻는다. “왜.” 나는 그냥 웃는다.
엄마가 김포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인천에서 고부간의 갈등으로 집에서 나가신 엄마는
큰집으로, 딸네로 방황을 하니까. 오빠가 김포의 남은 땅에다 농원을 만들고 집을 지었다.
오빠도 노후에 내려간다고, 오만 평에 낚시터도 있고 밤나무도 있고 사과나무도 있고
사슴도 있고 공작도 있고 아주 큰 농장을 만들었다. 도우미로 환길이 엄마 이모님이 우리
엄마를 모시기로 했다.
올케와의 갈등으로 사춘기를 힘들게 보내던 울예는 결혼 후에도 행복하지 못하고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 남매를 두고 오십 대에 질병으로 또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다. 울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지체장애인으로 활동하며 일 년에
한 번씩 마을 전 장애인들에게 국수 잔치를 열어줬다. 십일 년 하고 지금은 코로나로 쉬고
있다.
사이버대학에서 복지 공부를 하고 졸업을 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사춘기를 보냈던 울예, 자신이 살기 위해
반항을 강하게 했던 울예, 소녀 시절을 황제처럼(너무 불쌍해 황제라고 썼다) 누리다가
장애인으로 살아가려면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깎이 인생의 정점을
눈앞에 두고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복지 공부를 했고 2021년 드디어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앞으로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장애인들에게 글 친구를 만들어 마음을 풀어내라고 권하고
싶다.
복지사가 된 후 방통의 문화교양학과를 다시 지망했다 글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울예도 낙서를 쓰다 공부하게 되었다. 인생 여정을 남보다 몇 배 힘들게 살아낸
울예, 장애인들을 만나면 사연들도 깊다. 항상 공부하고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한다. 손가락
두 개만 움직이는 아령도 내 권유로 공부하고 올해 졸업을 했다. 그리고 장애인센터에
간사로 취직을 했다. 또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올해 경영학과 신입으로
들어온 동료도 있다. 열정을 쏟을 때 꿈은 이루어진다.
갑자기 폐암으로 오빠가 돌아가셨다 고령의 구십 세 어머니 앞에 가버린 아들, 물질을
사랑했던 오빠와 올케 재산가의 목적은 성공했지만, 가족관계를 평생 갈등 속에 살게 했다.
행복하지 못했던 가족들, 현실은 모두가 빈손 들고 가셨다.
미국에 있는 동생도 누나가 복지사 된 것을, 알면 기뻐할 것이다.
갈등을 이겨내지 못한 울예는 인생의 꿈을 송두리째 신화 같은 태풍에 다 잃어버리고
큰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울예는 장애인이 된 후 가족을 이십 년째
만나지 못했다. 물질이 전부라는 좁은 의미로 가족이 불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가족 상담을 통해 나누는 사랑과 배려 화목이란 사례를 배우는 치유가 필요한
우리 가족들이다. 따뜻하게 살아가는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싶다. 가족 모두에 삶이 새롭게
바꾸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기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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