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가작 _「저무는 햇살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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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작-산문학 이석재
저무는 햇살 속에서
또 한 번의 계약종료를 맞이한다.
십 년 넘게 다녔던 회사도 청각장애로 인해 복지카드를 발급받자마자 명예퇴직을
종용했었는데, 처음부터 계약직으로 들어간 회사임에랴. 2년의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김없이 계약종료를 통보해 온다.
조금 우스운 것은 장애인에게 붙이는 계약종료 사유가 대부분 작업 위험성이 높다는
사유를 댄다. 처음부터 장애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채용한 회사에서 계약 종료할 때는
그 사항을 몰랐던 것처럼 핑계를 대는 것이 어이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장애인이라서
더욱 위험을 조심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근무했던 여러 작업장의 사고 발생율은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훨씬 더 높았다. 비록 장애의 등급과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답답하리만치 작업 지침서대로 작업을 진행하곤 했었다.
차라리 지급되는 급여 대비 작업 효율성이 낮아서 비장애인 근로자로 대체하기
위해서라는 사유를 붙이는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런 이유를 붙이기도 어려운 것이 대부분의 작업장에서 장애인에게는 최저시급
기준을 적용한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일한 작업장에서 동일한 일은 수행하여도 대부분 장애인의
근로소득이 비장애인 대비 적게 지급된다.
내 경험으로는 장애인을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회적 객체로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비장애인보다 열등한 사회적 객체로 규정하려 드는 비장애인들의 편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규직이었던 대기업에 다닐 무렵 나는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유로 느닷없이 업무 부적합
판정을 내리고 명예퇴직을 요구하는 회사에 대해 부당하다고 맞섰다. 그러자 회사는 1년
또는 10개월 단위로 창원, 인천, 서울, 춘천 등지의 지사에 당시 영업직이었던 사람을
기술직으로 발령내어 업무성과를 내지 못하게 하며 부서장을 통해 지속적인 명예퇴직을
요구했었다.
그런 생활이 몇 년 동안 계속되자 업무성과도 내지 못하고 객지의 원룸에서 혼자 사는
생활 속에서 일상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건강도 안 좋아지면서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가족과의 관계도 서서히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무엇보다
가족 관계의 회복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명예퇴직을 받아들이고 나왔지만 씁쓸한 뒷맛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세월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지나간다.
사십대 중반의 길 위에서 장애인이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내 삶 속에서는 많은 것들이
폐차된 자동차처럼 멈추어 버렸다. 특히 한창 일할 나이에 맞이한 청각장애는 가장의
책임감과 생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막다른 골목처럼 다가왔다.
아내조차 내가 장애인으로서 마주해야 하는 그 아득하고 드높은 사회적 편견의 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느닷없이 그만두어야 했고, 좁디좁은 직업선택의
길목에 서서 전혀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한다고 상황을 설명하자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딸과 아들이 먼저 나를 위로하며 받아들여 주었다. 실직으로 인한 갑작스런 수입의
감소로 살던 아파트도 평수를 줄여 이사를 해야 했지만, 두 아이의 대학 공부와 딸애의
결혼까지는 큰 빚을 지지 않고 뒷받침을 해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딸애가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목표로 했던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과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 직전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하며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의 흐뭇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보람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의 순간은 잠깐이었고 아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홀로 고군분투해 온 십 년의 세월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벽을 느끼지 못하는 아내는 나의 무능력함과 미래에 대한 준비
부족, 그리고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혹시 장애를 고칠 수 있을까 싶어 서울대병원부터 시작하여 여러 병원의 난청 클리닉을
전전했지만 원인도 찾아내지 못했고 치료방법도 없다는 결론만 동일하게 내려졌었다.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유전적인 요소를 추정할 뿐이었다.
그렇게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도 가장의 책무를 내려놓을 수 없었고 특별한
자격증도 없는 처지였기에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오토바이 배달원, 건설현장 노동자, 부두 줄잡이, 대형마트 축산코너에서 고기 썰기, 선원
생활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12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당연했고, 때때로 20시간 이상 철야 작업까지 하고 다음 날 몽롱한 상태로 일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한 곳에서 14일에 계약 끝나면 다른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그 다음 날인 15일부터 곧바로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을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뒤늦게나마 몇 해 전부터 아내가 맞벌이를
시작하여 나 홀로 지고 가던 가정의 경제적 부담을 많이 덜어 주었다.
요양병원 간호조무사로 혹은 유치원의 영양사로 일하면서 평소에도 약했던 몸으로
뒤늦게 사회생활 한다고 고생하는 아내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퇴근하고 집에 올 때마다
힘들어하는 모습이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가 조금이라도 더 휴식의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일뿐이었다.
아내가 맞벌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퇴근하고 집에 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일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 되었다. 요리는 손맛이 좋은 아내가 대부분
담당했지만, 김치찌개를 끓이고 볶음밥이나 라면 끓이는 정도는 기꺼이 내가 담당했다.
가사 노동이라는 것이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표시도 잘 나지 않는 일이라서 가끔은 마음이
먼저 지치기도 했지만 반복해서 하다 보니 습관처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혼자 직장 다닌다고 가사 노동에 대해 쉽게 생각하고 무시해 온 나의
무지에 대해 반성하면서 뒤늦게나마 아내에게 미안했고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딪히고 깎여가는 사십 대에서 오십 대로 넘어가는 십 년의 세월을 보내다 보니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취미 생활도 바뀌었다.
하루하루 급변하는 요즈음의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과 만나도 대화하기가 힘들어지니 서로 어색한 관계로 변해가고, 취미 생활도
어울려서 함께 하는 등산이나 운동에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거나 낙서를 끄적이는
정도로 정적인 생활로 변해갔다.
아내와 함께 2주일마다 한 번씩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고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이
일상에서 힐링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십 년이 넘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은 내 몸과 마음 곳곳마다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이 내 장애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시작한 그 이후의 시간은 그 상흔을
덮어가는 부드러운 치유의 물결처럼 찾아왔다.
비록 악바리처럼 살아내야 할 시간은 여전히 내 앞에 버티고 있지만, 보청기를 끼고도 큰
소리로 나누는 대화를 당연하게 여기며 잘 못 들었다고 두 번 세 번 되물어도 이해해주는
가족들과 형제들이 있어 든든함을 느낀다.
올해는 새해를 맞이하여 환갑이 된 아내랑 동해안으로 2박 3일 코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얼마만의 여행인지 아내는 젊었을 때처럼 기뻐했다. 날씨도 화창했고 눈도 내리지 않는
날이 이어져서 다행이었다.
비록 구입한지 15년이 넘는 낡은 자동차를 타고 허름한 모텔에서 잠드는 여행이었지만,
저녁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아프고 힘든 시간의 기억들을 나누며 서로서로 수고했다고
고마웠다고 다독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알게 모르게 쌓여온 마음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시간의 여정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였다.
부부간에도 서로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상처 주는 말을
던지며 함부로 대했던 일들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왜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바다가 보이는 모텔 객실의 창가에 앉아 캔맥주를 나누며 아내도 나도 마음에 쌓여있던
힘들고 서러웠던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고 마음을 비워갔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보지 못했던 얼룩과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니 선명하게 보이는 생채기들을
커피를 마시고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서로 깨끗이 닦아주고 위로의 연고를 발라주는 그런
시간을 가졌다.
길고 긴 삶의 길 위에서 어느 누군들 아픔과 고통과 흔들림을 피해 갈 수 있으랴. 때로는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깨어지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그런 인생 속에서도 시간은 지나간 고통을 아름답게 색칠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아내와 나는 망각과 치유라는 시간의 능력을 빌려 아프고 힘들고 어리석었던 한 시절의
모습들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함께 살아온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즐거웠고
기뻤고 행복했던 기억들만 간직하며 때때로 꺼내보기로 했다.
어쩌면 오랫동안 미루어 온 숙제를 끝낸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새로운 출발을 위해
강릉에서 집을 향한 걸음을 재촉했다.
저무는 햇살에 휘감겨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아내의 표정이 한없이 맑고 평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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