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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수상작] 입선「딸아 딸아 내 소중하고 대견한 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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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술누리
댓글 0건 조회 170회 작성일 25-04-10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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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선 – 산문학 송인숙


딸아 딸아 내 소중하고 대견한 은지야


1996년 이혼을 했다. 은지아빠랑 헤어지고 늘 우리 모녀 둘 뿐이었다. 서로 의지 하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때론 친구처럼 얼굴 마주 보며 찌찌 배배 까르르 까르르 웃으면서

그렇게 지냈다.

혼자서 딸아이를 키우려니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난 결심했다. ‘친구가 있는 일본으로가

몇 년 만 돈을 벌어오자. 그래서 은지랑 조그만 방이 있는 가게를 얻어 식당을 하자.

자잘한 돈 걱정은 안 할 거야.’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은지와 살아야 한다는 일념에 초등학교

1학년인 은지를 시어머님께 맡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은지 걱정에

공항으로 향해 가는 내내 손수건 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어떻게 비행기를 탔는지 모르게

일본에 도착했다.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만 좀 울어. 눈 퉁퉁 부어서 앞도 못 보겠다.”

쓰다듬고 달래주었다. “그래 빨리 벌어서 한국 가서 은지랑 같이 살면 되지. 자! 힘 내.”

용기를 주었다. 친구 집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하룻밤을 자고 문밖을 나갔다. 아주 깨끗한 시골 풍경이었다. 우리네 시골이 랑 별다를 게

없는 논 있고 밭이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 보니 편의점도 있고 음식점도 있었다. 어디선가

낯선 말이 들렸다. 이웃끼리 서로 아침 인사하는 말에 참 이곳이 일본이지 실감이 들었다.

일본에서 첫 아침 식사하고 친구랑 모닝커피 마시러 커피숍으로 갔다. 15분 정도 걸어가니

친구 식당도 있고 그 옆에 아담한 커피숍이 있었다. 커피 삶은 계란 토스트 한 쪽이

모닝커피 세트다.


동네 아줌마 어르신들이 아침에 집안일 마치고 앞치마를 한 채로 아침 문안 인사 겸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이다. 그렇게 나의 일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단은 일본어를 배우는 일이다. 밤낮으로 한국에서 사 가져온 일본어 기초 생활회화

책부터 공부하기로 했다. 친구 가게에서 언어가 안 되니까 주방 설거지 담당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하면서 월급 타면 은지 학원비며 용돈을 매달

보냈다. 나름대로 저금도 하면서 허튼 돈을 십 원도 안 쓰고 절약했다. 1년이 지나가는데

친구가 편의점 도시락 납품 회사로 바꾸었다. 일본 음식을 몰라서 친구 소개로 동경에

있는 식당으로 옮겼다. 동경은 큰 도시라서 그런지 식당 주인부터 종업원까지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뭐든 텃세였다. 시시콜콜 따지는 통에 일 하기가 힘들었다. 많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은지만 생각했다. 꾹꾹 참아내며 일을 하던 중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본 식당에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스카웃 제의를 했다. 시간당 천 원을 더

준다했다. 난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 일하기로 했다. 여자 사장님은 일본 분이고

남자 사장님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동경 대학원으로 공부하러 오셔서 여자

사장님과 결혼했다고 했다. 남자 사장님께서 기타도 잘 치고 바둑 잘 두어 가게에 손님이

꽤 많았다. 내 가게처럼 열심히 일을 했다. 여자 사장님께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일본어 국어 노트를 사오셨다. 일본어 아이우에오부터 가르쳐주셨다. 난 가게 메뉴판을

집에 가져가서 며칠 밤을 쓰고 또 쓰고 달달 외웠다. 눈감고도 쓸 수 있게 되어 주방에 서

나왔다. 홀 주문과 서빙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말도 잘 하고 쓰기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늘

은지 생각에 맘이 편치 않고 아렸다. 일 끝나고 집에 오면 혼자 흐느끼다가 잠이 들곤 했다.

맛있는 걸 먹을 때나 우리 은지 또래의 예쁜 옷을 볼 때면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혼자서는

맛있는 걸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주문을 걸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우리 이쁜

은지랑 같이 살 수 있어. 인아! 힘내자 할 수 있어 내가 내 마음을 달랬다. 그런 모습을 본

사장님께서 “일본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니까 인숙씨가 집이 있고 어느 정도 고정적인

수입이 생기면 딸아이를 데려와 일본에서 교육시킬 수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라는 말에

난 큰 결심을 했다. 그래, 더 열심히 해서 조금 큰 집으로 이사하자. 은지를 데려와야겠다고

결심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은지를 데려와 같이 살 마음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입이 부르트고 몸살이 났는데도 웃으면서 일을 했다.


3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조그만 내 집도 생기고 안정이 되었다. 은지를 일본으로 데려올

준비를 조금씩 시작했다. 겨울방학 때 친한 언니가 한국에 다니러 가는데 은지를 부탁해

관광비자 15일 방문하는 걸로 은지를 3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엄청 설레어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난 비자가 없어 은지를 마중하러 공항에 갈 수가 없었다.

집에서 은지가 좋아하는 떡볶이랑 김밥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세 시간이 일 년 같았다.

드디어 은지가 잘 통과해 집에 오는 버스를 탔다는 전화를 받고 눈물이 났다.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 은지가 케리어를 끌고 왔다. 달려가서 은지를 안고 엉엉 울었다.

은지는 너무 좋아서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맞지?” 엄마를 수십 번 불렀다. 그렇게 은지랑

보름을 보내고 딸을 보냈다. 한 번 보고 나니까 더 눈에 밟혀서 더 마음이 아팠다. 은지를

데려와서 학교도 보내려고 학교도 알아보고 은지에 게 엄마랑 일본에서 학교 다니면서

살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엄마랑 같이 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4학년 때 미국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부탁드렸더니 한국에 들러 은지를 데리고 일본에 와 주셨다.

은지는 2002년 월드컵 때 일본 와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걱정과 달리 일본학교에 잘

적응하는 딸이 고맙고 대견했다.


우린 같은 침대에서 자고 마트도 자전거 타고 같이 가고 학교 갈 때랑 내가 일 하러 갈 때

말고 늘 같이였다. 은지도 학교 잘 적응 할 때쯤 집에서 가까운 곳에 급하게 한국 식당이

나와서 난 그동안 모은 돈이랑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아 내 식당을 하게 되었다. 쉬지 않고

점심식사 때부터 새벽 5시까지 장사를 하며 악착같이 영업을 했다. 주방도 보고 카운터도

보면서 최소인원으로 인건비를 아꼈다. 마트도 은지랑 자전거 타고 같이 가서 물건을 사와

음식 준비며 청소며 모든 것을 혼자 하며 아꼈다. 중학교까지만 다닐 수 있어서 조급했다.

우리 모녀는 일본 영주권이 없어 고등학교를 보내려면 내가 일본 사람이랑 결혼해서

영주권을 취득해야 했다. 조금 더 빨리 돈을 모아서 한국에 갈 생각에 밤낮으로 영업을

했다. 토요일이면 아침 일찍 김밥을 50줄씩 쌌다. 동네 한국 가내 수공업 하는 가방공장

구두공장 보석공장에서 일하는 한국 직원들에게 김밥 서비스로 영업을 했다. 저녁에 우리

가게로 저녁 식사 겸 술 한잔 하고 노래방 기계가 있어서 겸사겸사 식사들 하러 오라고

뇌물로 김밥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꼭 저녁에는 우리 식당에 와서 술 한 잔

마시고 노래도 부르면서 매상도 올려줬다. 그렇게 주말이면 겉절이 또는 김밥 잡채 등등을

만들어서 공장마다 갖다주면서 식당 영업을 했다. 그럼 주말이면 줄을 섰다. 난 박리다매를

하면서 서비스로 동치미 만들어 마무리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열심히 장사를 하니까

동네에서 잘해주고 싸게 주는 가게로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아주 잘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져 일본대학병원에서 6시간 대수술하고 3개월 만에

깨어났다, 중환자실에 6개월 있다가 일반병동으로 옮겼으나 반신불수 장애인이 된 엄마의

병원비며 집세, 가겟세를 어린 은지가 감당을 할 수 없으니까 은지는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일본 한국 영사님께서 우리 모녀 얘기를 들고 도와주셔서 우리

모녀는 한국으로 올 수가 있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병원 복지사에게 우리 모녀를 수급자로

만들어 주라고 영사관님이 부탁을 하셨다. 난 수급자가 뭔지도 몰랐다. 119를 타고 곧장

서울국립의료원에 입원 했다. 우리 모녀가 병실에 짐을 풀고 나니까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입원하는 환자 짐이 이삿짐처럼 많으니까 궁금해 했다. 우리 은지한테 질문을

마구 했다. 난 기도 삽관을 뺀지 얼마 안 되어서 말을 잘 할 수가 없었다. 침착하게 은지는

설명을 했다. 저희 엄마랑 저는 일본에서 살다가 엄마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일본에서

수술하고 한국 병원으로 오게 됐어요. 짐이 많아요. 우리는 짐을 대충 정리해서 침대 밑에

넣어 두고 병원 밥을 먹는 데 나는 눈물이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타국에 돈 벌러 가서 9년

만에 한국에 반신불수 장애인 되어 왔기에! 열심히 노력하면서 산 것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왔나. 억울한 맘이 들어서 눈물만 나오고 살기 싫고 죽고 싶었다.

매일 눈물로 살았다. 인생 포기 상태였다.


은지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 누워있고 기저귀를 차고 있어도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살아만 있어요. 제가 이제부터 엄마 옆에서 엄마 돌봐주고 돈 많이 벌어서

같이 행복하게 살자. 엄마가 나 버리지 않고 일본까지 데리고 가서 키웠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엄마 지켜줄게요. 눈물 그만 흘리고 용기 내요. 전 엄마밖에 없잖아요.” 이

말에 난 머리에 번개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 딸이 있지. 내가 지켜주고

사랑으로 품어줄 딸이 있지. 그래! 일어서자!” 다짐했다.


병원 보조침대에서 잠자고 학교에 가는 딸을 보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재활 치료를

받았다. 식사 시간 말고는 병실 침대에 가지 않았다. 복도나 운동 매트 에서도 쉬지 않고

운동하고 걷고 또 걸었다. 은지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데

중학교 내신 성적이 없어 경기 여상을 가게 됐다. 이 또한 축복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짝꿍을 잘 만났다. 엄마가 일본에서 갑자기 쓰러져 뇌수술하고 한국에 오는 바람에 집이

없어서 엄마 병원에서 간병하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은지의 말을 듣고 지나 친구는 자기

엄마에게 말을 해 우리 은지를 받아 주셨다. 지나 엄마도 혼자서 딸 둘을 책임지는 힘든

환경이었는데 너무도 감사했다. 은지와 지나 그리고 동생 미리는 세 자매가 되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세 자매 아침 식사를 챙기면서 “은지야 이것 간 좀 봐 줄래?” 하면서

챙겨놓으시고는 미싱사인 지나 엄마는 바삐 출근 하셨다. 우리 은지를 먼저 챙겨 주면서

친 엄마보다 더 잘해주신 천사 지나 엄마, 수능 시험 날에 따뜻한 밥을 해서 먹여보내고

전화까지 주셨다. 병원에서 걱정 만하니까 은지 따뜻하게 밥 먹여 수능 시험장에 갔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신 천사. 그렇게 은지는 고등학교 짝꿍 집에서

엄마 집처럼 사랑 듬뿍 받으며 편하게 다니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모녀에게 해마다

김장김치며 여러 가지를 챙겨서 해마다 보내 주시는 천사. 정말 감사하고 감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인송담대 간호학과에 다니다가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혼자서 할

수 없었다. 엄마도 돌보고 알바를 하면서 다니다가 힘들어서 은지는 2학년 때 자퇴를 하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다. 병원에서 근무하며 엄마도 돌봐주면서 착하게 사회 생활하다

보니 꼭 대학은 졸업해서 전문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돈도 모으면서

차근차근 대학에 갈 준비를 하면서 착실하게 알아보고 있었다. 엄마도 혼자서 나름대로

열심히 고양장애인종합복지관에 다니면서 바리스타 SCAE 수료증도 받고 컴퓨터도 배우고

글짓기 수업도 하면서 길거리 시화전도 해마다 참여하는 걸 보고 재활치료도 열심히 하며

씩씩하게 사는 모습에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존경스럽다며 꼭 안아 주었다.

활동지원사님도 집으로 오시고 하니까 은지는 결심을 하고 대학교 원서응시를 여기저기

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13년이 흘러서 수도권에서는 갈 수가 없어 지방대를 신청했다.

드디어 원광보건대 방사선과에 합격을 했다. 이때 마침 미국 계신 이모랑 이모부가 한국에

몇 년 만에 오셨다. 조카 딸이 엄마 잘 돌보면서 착하게 잘 컸다고 대학 등록금을 선물로

주시고 가셨다. 큰외삼촌 도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타고 잘 다니라고 노트북을 사주셨다.

언니랑 큰 오빠가 조카딸을 챙겨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 엄마로서 해 준 것도 없는데 아픈 엄마를 돌보면서 잘 커 준 딸 은지가 너무 대견했다.

꼭 안아주면서 “고맙다. 사랑한다. 엄마 옆에서 엄마 지켜줘서 천만번 고맙고 앞으로 더

우리 모녀만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주택청약을 열심히 붓고 조금씩 저금했다. 그런 우리에게 국민임대주택 20평 당첨,

휠체어 탄 중증장애인이라서 넓은 평수로 이사 가게 되었다. 드디어 은지 공부방이 생겼다.

지금까지 고생한 우리 모녀의 인생에도 희망 무지개가 떴다. 난 이렇게 나라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

[이 게시물은 예술누리님에 의해 2025-04-15 09:35:47 공지사항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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